아드리안 파이퍼(Adrian Piper)
눈을 떴을 때, 그에게는 완벽한 하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는 창밖의 날씨처럼 적당한 온도였고, 이메일함에는 좋은 소식만이 가득했다. 중요한 미팅에서는 설득력 있는 아이디어들을 쏟아냈고, 반응은 좋았다. 세상은 그의 것이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었다.
눈을 떴을 때, 그녀의 하루는 다른 시나리오였다. 전날 밤에 완성한 그림은 아침에 보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캔버스를 찢어버렸다. 먹고 살기 위해 카페 아르바이트를 나가야 했지만, 머릿속은 온통 버려진 그림 생각뿐이었다. 버스는 눈앞에서 떠났고, 비는 쏟아졌다. 세상이 그녀를 향해 등을 돌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둘은 각자의 자리에서 우연히 같은 작품을 마주했다. 거울처럼 반짝이는 표면, 그리고 그 안에 새겨진 문장.
EVERYTHING WILL BE TAKEN AWAY.

그는 멈춰 섰다. 자신이 쥐고 있는 모든 것이 한순간에 부질없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완벽한 하루도, 작은 승리들도, 모든 것도 결국 사라진다면? 커피의 온도 따위가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방금 전까지 빛나던 하루가, 문장 하나에 의해 불길한 기운을 띠기 시작했다.
그녀는 문장을 보고 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모든 것이 사라질 거라면? 이 엉망인 하루도, 실수도, 불안도 결국은 사라질 텐데. 이상하게도 가벼워졌다. 세상이 자기에게 등을 돌린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런 것이었을 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같은 문장을 보고, 하나는 무너졌고, 하나는 살아났다.
아드리안 파이퍼의 작품은 그런 것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순간에 따라,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한 문장이 되기도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문장 자체가 아니라, 그 문장을 마주한 우리가 누구인가, 어떤 상태인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일지도 모른다.
아드리안 파이퍼(Adrian Piper, 1948~)는 미국의 개념미술가이자 철학자로, 칸트 철학과 개념미술을 융합하여 사회적 질문을 던지는 독창적인 작업을 펼쳐왔다. 인종, 젠더, 신뢰와 윤리를 탐구하는 그녀의 작품들은 때론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깊은 성찰을 유도한다. 『The Probable Trust Registry』, 『Catalysis』 시리즈 등으로 유명한 그녀는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독일 베를린에서 연구와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거리 퍼포먼스 시리즈 『Catalysis』 중 한 장면.


사진 출처:
• katybeltran
• flash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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