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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 (Auguste Rodin) 1840. 11. 12 ~ 1917. 11. 17




‘현대 조각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댕은 1840년에 태어나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해인 1917년에 사망했는데 그는 그 당시의 저명한 예술가들 중의 한 사람으로, 후세의 사람들에게는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위대한 인물이었던 미켈란젤로 이후로 서양 조각계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 조각가로 여겨지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생각하는 사람’은 로댕의 대표적인 작품인데 이는 근대 조각을 여는 출입문 구실을 했으며, 이 작품으로 근대 조각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생각하는 사람 (1880년작, 청동, 높이 186cm)
로댕의 <지옥의 문>에는 단독상이나 그룹상으로 유명해진 여러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후에 그 상들에는 고유의 제목이 붙여졌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생각하는 사람> 또한 그 대표작으로 지옥에 스스로의 몸을 내던지기 전에 자신의 삶과 운명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팽팽한 긴장감과 사실성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로댕 전기를 쓴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말없이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다. 그는 행위하는 인간의 모든 힘을 기울여 사유하고 있다. 그의 온몸이 머리가 되었고, 그의 혈관에 흐르는 피가 뇌가 되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쉬고 있는 헤라클레스(Heracles)이다. 그는 굵은 눈썹, 황소 같은 목, 야성적인 용모를 가지고 있다. 가공할 만한 근육에서는 힘이 느껴지지만, 고개를 숙이고 숙고하는 듯한 형상에서 고도의 집중력이 발산되고 있다. 그리고 자세히 관찰해 보면, 전체 형태가 좌상이라 웅크린 덩어리가 단순하게 보여 좀 더 형태가 강하게 보이고 있다. 내부 덩어리 구조는 근육의 흐름을 극도로 강조하고 있으며 빈틈없이 잘 짜여진 비례나 해부학적인 표현은 인체의 표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지옥의 문 (1880~1888, 석고, 100X396X775cm)








‘지옥의 문’은 1880년 프랑스 정부의 의뢰로 제작되었으며, 로댕 전 생애를 걸쳐 진행되었던 작품이다. 로댕은 원래 단테의 신곡에서 소재를 구했으나 최초의 의도와 상관없이 점차 로댕의 개인적인 비젼을 탐구하는 작품이 되었고, ‘생각하는 사람’, ‘입맞춤’ 등 로댕의 대표작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지옥의 문’을 밑에서 위로 비스듬히 바라본 모양 맨 위에는 3사람의 망령들이 위치해 있고 그 밑에는 그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이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세망령 (1880년, 브론즈, 파리 로댕 박물관 소장) ‘지옥의 문’ 맨 위에 있는 세사람은 단테의 시에서 유추해 보면 자신의 고통을 이양기하는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 틈 속에서 도망치는 망령들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담 (Adam, 1880년, 브론즈, 파리 로댕 박물관 소장) ‘지옥의 문’ 문짝에 조각되어 있으며, ‘이브’와 함께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코가 깨진 남자’ (1864년, 브론즈, 파리 로댕 박물관 소장) 이 얼굴이 만들어진 것은 로댕의 작품 활동 초기로 생계를 이어가기 매우 어려운 때이다. 그는 버젓한 모델을 구할 수 있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이웃집에 사는 비비라는 가난한 노인의 얼굴에서 착상을 얻었다. 그러나 난방 시설이 없는 아틀리에는 너무 추워서 비비의 머리를 빚은 점토가 얼어 갈라졌으며 두개골은 깨지고 간신히 얼굴만 지탱할 수 있었다. 그래서 코가 깨진 이런 얼굴의 형태가 되고 말았다. 그는 이러한 얼굴을 탄생시킨 후 계속해서 시리즈로 이 작품을 제작하였 는데 후에 대리석으로 조각한 작품은 살롱전에 입상하였다. 그리고 ‘지옥의 문’ 제작 때 계속 사용되어 ‘생각하는 사람’의 바로 옆에 배치되게 하였다.




돌을 지고 있는 여인상 (1880~1881년, 브론즈, 파리 로댕 박물관 소장) 이 작품은 ‘지옥의 문’ 왼쪽 기둥 꼭대기에 주름에 약간 가려진채로 건축물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1883년부터 로댕은 이 주제를 소재로한 작품을 출품하였는데 그는 여인좌상의 오래된 주제 (그리스 조각에 나타난대로 물건을 나르는 여인의 모습)를 전체적으로 새롭게 재창조하였다. 로댕 자신은 작품 생활 초기에 브뤼셀에서 장식적이고 근육이 발당한 역학적인 여인좌상을 빚었었다. 인간의 존재를 억누르고 있는 절망감을 표현하기 위해 로댕은 이 여인이 돌의 무게 때문에 지치고 찌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도록 표현함으로써, 마치 여인이 운명 때문에 슬픔에 잠겨 있는 것처럼 표현하였다. 로댕은 돌 대신 유골단지를 메고 있는 다른 여인의 모습을 제작하기도 했다.




나는 아름답다’ (1882년, 브론즈, 파리 로댕 박물관 소장) 이 2인상은 ‘지옥의 문’ 오른쪽 기둥 꼭대기에 있는데 ‘떨어지는 사람’과 ‘웅크린 여인’으로 각각 한 사람씩의 독립된 작품으로도 제작되었다.




떨어지는 사람’ (1882년, 브론즈, 파리 로댕 박물관 소장) 육상 선수의 모습인 이 작품은 ‘지옥의 문’ 인쪽 문짝 위에 상체를 뒤로 젖히면서 허공을 떨어져 내리는 모습이다. 힘이 강하고 역학적인 근육을 가진 사람을 묘사함으로써 로댕에게 많은 영향을 준 미켈란젤로의 작품 세계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작품중의 하나이다.




입맞춤’ (The Kiss, 1881~1889년, 파리 로댕 박물관 소장) 로댕은 ‘지옥의 문’ 오른똑 아래에 서로에 대한 감정을 깨닫는 순간의 두 연인을 재현하였으나, 나중에 작품의 전체적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아 그냥 떼어내고 살롱전에만 출품하였다.




‘달아나는여인’(Fugit amor, 1883~1884년, 브론즈, 파리 로댕 박물관 소장) 이 2인상은 ‘지옥의 문’ 왼쪽 문짝 가운데와 오른쪽 문짝 꼭대기에 방향을 바꾼 형태로 각각 조각 되어있다. 그 중 남성은 작품 ‘탕아’에 다시 나타난다. 관능적인 인간의 사랑을 느께게 하며, 달아 나는 여인을 붙잡기 위해 뻗치고 있는 남성의 두 팔을 보면 붙잡아 두고 싶지만 잡을 수 없는 여인의 아름다운 매력을 더욱 느께게 하고 있다. 같은 주제로 로댕은 많은 브론즈 작픔들을 제작 하였고 대리석으로 만든 작품도 여럿 있다.




‘다나이드’ (1885년, 브론즈, 파리 로댕 박물관 소장) ‘지옥의 문’을 위하여 구상된 작품 ‘다나이드’ 또한 다른 많은 작품들처럼 개별적으로 제작되었다. 짖눌리고 축 늘어진 형태를 통해 죽음을 기다리는 절망감을 나타낸 작품 중의 하나이다.




‘저주받은 여인’ (1885년, 브론즈, 파리 로댕 박물관 소장) 이 작은 조각은 ‘지옥의 문’의 배경을 만들기 위해 제작한 많은 소품들 중에 하나이다. 두 사람의 동작이 ‘지옥의 문’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보들레르의 영향이 조각에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탕아’ (1889년, 브론즈, 파리 로댕 박물관 소장) 비통한 몸짓의 이 인물은 ‘지옥의 문’의 오른쪽 문짝 아래에 있다. 작품의 제목은 복음서의 비유를 상기 시킨다. 그러나 1894년 처음 단독 작품으로 출품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 작품을 ‘세기의 아이’라 칭하였다. 그 밖에 ‘버려진 아이의 기도’ 혹은 ‘죽어가는 군인’등으로 불리었다. 이 모든 이름들은 로댕이 표현하기를 원했던 절망에서 오는 긴박한 심리를 잘 나타낸다.




‘Ugolino와 그의 아들들’ (1882년, 브론즈, 파리 로댕 박물관 소장) 이 작품은 ‘지옥의 문’의 왼쪽 문짝에 위치하고 있다. ‘설교하는 성 요하네’의 모델이 된 이탈리아 사람 Pignatelli가 이 작품의 모델이 되었다. 13세기 이탈리아 두 도시국가들간의 전쟁에서 생포된 우골리노 델라 게라르데스카는 반역죄를 선고받고, 두 아들 및 손자 두 명과 함께 피사에 있는 기아의 탑에 투옥되었다. 탑의 열쇠는 강으로 내던져졌고 그들은 서서히 아사상태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아이들의 죽음을 목격한 우골리노는 죽기 전에 그들의 시신을 먹었다. 교회가 금기 시한 이러한 행동 때문에 그는 지옥으로 보내졌다. 이 내용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내용이다.




‘칼레의 시민’ (1884~1895년, 브론즈, 높이 209.55cm)
6명의 부르즈와 시민들의 서있는 형상인데 칼레시의 요청에 따라서 작작한 로댕의 작품으로, 청동으로 만든 오리지널은 1895년 완성되었다. 원형 석고틀은 1889년 주조되었는데 20세기 중반 까지 다른 11개의 틀이 주조되었다. 마지막 원형은 1995년 완성되어 현재까지 도합 12개의 상이 있으며, 로댕의 걸작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역사적인 맥락과 배경이 있다. 1346년 9월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시를 포위한다. 당시에 칼레시는 기사 장 드 비엔느가 요새 수비대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영웅적으로 저항하여 무려 11개월 동안이나 영국왕의 군대 발목을 잡아놓고 있었는데 결국 식량이 떨어져 항복 조건을 협상하려했다. 지치기도하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나있던 영국왕은 여섯명의 시민을 넘겨주면 이들 만 처형하고 시민들의 목숨은 구해주겠다고 했다. 이에 앞서 상기 여섯명의 시민들이 스스로 연 장자인 ‘으스타슈 셍 피이에르’를 선두로 목에 밧줄을 두르고 도시와 성의 열쇠를 바치려고 왕 앞 에 나타났다. 에드워드 왕의 왕비인 ‘필리파 드 헤이노’가 기독교 사랑을 내세워 왕을 설득해 영 국왕은 이들의 목숨을 보존해 주었다. 칼레의 영웅적인 시민의 대명사격인 6인은 소위 ‘노블레스 오블리즈’의 전형이었던 셈이다.






그 외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서 자연과 고전에 충실하고 느낀 바를 그대로 표현하려는 그의 작품 의지와 아울러 당시의 예술 관례에 얽매이지 않고 전통적 형식주의의 굴레를 일거에 타파해 버린 그의 예술의지는 현대를 살아 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술의 영원성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메시지를 남겨 주었다.